한국 천주교회사상 최대의 박해 중에 하나인 기해 교난(己亥敎難)이 1840년 초에 들어서면서 마무리되고, 성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는 1846년의 병오 교난(丙午敎難)이 일어나기 몇 해 전인 1841년(헌종 7년)에 조선교회에서는 또 한 분의 성인이 순교를 당하였으니, 그가 바로 김성우(안토니오)이다.

성 김성우(金星?, 안토니오, 회장 1795~1841)는 1795년(정조 19년)에 경기도 광주(廣州) 지방의 구산(龜山)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면서도 정직하고 인심이 후하여 지방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집안에서 생활한 그도 성격이 온화하고 후덕하였으며, 이에 외교인들도 그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세 형제의 맏이였던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즉시 입교하였으며, 이후 친척과 이웃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전파하여 그의 마을이 교우촌(敎友村)이 되도록 이끌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를 여의게 된 안토니오는 유방제(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사실을 알고는 성사를 자주 받으려는 마음에서 서울의 느리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성 밖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이라는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講堂)까지 마련하여 회장(會長)으로서 나 모방 신부를 한여름 동안 모시기도 하였다.

1839년 기해교난의 박해가 시작된 3월 21일에 안토니오의 형제들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나, 배교함이 없이 풀려난 적이 있었다. 석방되자마자 그들은 다시 밀고를 당하였다. 이 때 안토니오는 체포령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지방으로 가서 숨었지만, 구산에 남아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한 사람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안토니오의 첫째 동생인 김덕심(아우구스티노)은 본래 세속의 일에만 열심이어서 늦게야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으나, 관청으로 압송된 후에는 동헌(東軒) 한 가운데서 교리의 중요한 부분을 열심히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들 세 명은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심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석방되지 아니하고 거의 잊혀진 채로 광주의 옥에 갇혀있었다. 이듬해 박해가 끝나자 아우구스티노의 자식들은 백방으로 노력하여 부친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부친을 석방시킬 희망까지도 가졌었으나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채 세월만 흘러갔다. 아우구스티노는 옥중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로는 낙망의 유혹으로 순교를 하지도 못하고 자유를 얻을 수도 없음을 한탄하기만 하였다.

그로 인하여 병이 들어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진실한 통회와 애덕을 가지고는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안토니오의 둘째 동생은 사촌과 함께 여전히 옥중에 남아 있었다. 다만 아우구스티노가 죽은 다음부터 그들이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꿋꿋한 신앙심을 나타내지는 못했던 듯하다. 다만 그들은 1858년(철종 9년) 왕세자(王世子)의 탄생을 계기로 선포된 특사의 덕택으로 석방되기까지 오랫동안을 옥중에서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안토니오는 아내를 잃고 다시 열심한 교우와 재혼하였다. 그렇지만 포졸들의 수사망을 오랫동안 피할 수가 없었다. 기해 교난이 끝날 무렵인 1840년 1월경, 그는 어떤 배교자의 밀고로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의 포청(捕廳)으로 압송 당하였다. 포청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신앙심을 잃는 일이 없었다. 그는 옥을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자리를 잡고, 나머지 생애를 그곳에서 지내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옥중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열심히 천주의 교리를 전파하였는데, 그 열성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외교인 죄수들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중 2명은 진심으로 입교하였다고 한다.

이후 형조(刑曹)로 이송된 안토니오는 여러 차례 곤장(棍杖)을 맞고, 치도곤(治盜棍)도 30대나 맞았다. 이러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라고 강요하는 형관을 향하여 그는 천주교인임을 명백히 주장할 뿐이었다. 그 후 다시 형관에게 불려나가 치도곤 60대를 맞았으나 그의 훌륭한 용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밤에 당고개(堂峴)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고 순교함에 이르니, 때는 1841년 4월 29일(음력 3월 9일)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어떤 문헌에는 그가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훗날 친척들은 안토니오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인 구산에서 장례식을 거행한 후, 가족 묘 근처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이르러 그는 훌륭한 신앙의 증거자로서 용산 신학교(龍山神學校)로 이장되어 추앙을 받게 되었다.

발췌문헌 : 김옥희, {103위 성인전},